안녕하세요, 강형민입니다.
12화 본문
12화.
마트 한 구석에 마련된 반려동물 코너에는 토끼, 햄스터, 거북이, 앵무새, 심지어 도마뱀까지 다양한 반려동물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큰 물고기부터 작은 물고기들까지 다양한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다양한 크기의 어항들이 한쪽 벽을 채웠다.
그 앞에 물고기를 구경하기 위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 틈에는 커다란 덩치의 외국인도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답답하다고 벗어버린 후드 떄문에 온전히 드러난 라티아나의 새하얀 피부와 백금발은 누가 봐도 한국인의 모습은 아니라 눈에 확 띠었다.
게다가 아이들처럼 무구하기 짝이 없는, 솔직히 말하면 좀 모자라 보이는 행동 덕에 더 관심이 집중되는 것도 있었다.
“우리 언제 가요?”
인아가 그의 뒤에서 한숨을 쉬며 물었으나,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금색 물고기 멋있다.”
“나는 빨간색.”
“파란색 좋아.”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종알거리는 말에 라티아나도 끼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자기가 입을 열면 무슨 사태가 벌어지는지 병원에서 내내 경험한 탓에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위기가 찾아왔다. 머리를 양쪽으로 묶은 귀여운 여자애가 그에게 말을 건 것이다.
“아저씨도 물고기 좋아해요?”
인아는 그가 무심결에 입을 열까봐 기겁해서 그를 쳐다보았지만, 라티아나는 용케 소리는 내지 않고 그렇다는 듯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자 아이들이 이상한 눈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아저씨, 말 못해요?”
인아가 대꾸하기 전에 라티아나가 다시 입을 벙긋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이번엔 안경을 쓴 똘망똘망해보이는 남자아이가 말했다.
“그럼 손으로 말할 수 있어요? 나 재롱잔치 때 수화 배워서 안다요? 이게 안녕하세요고…….”
아이가 오른손바닥으로 반대쪽 팔을 쓱 쓸더니 주먹을 꼭 쥐어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게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이가 이번엔 두 손가락을 모았다가 이내 두 손을 위아래를 엇갈려 흔들어 보였다.
라티아나는 아이의 동작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인아도 저절로 아이를 쳐다보게 되었다.
아이들은 물론이요 어른도 자기 행동을 집중해서 보고 있으니, 신이 난 아이가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수화를 알려주려는 양 정신없이 손을 움직여 보였다.
아이들은 금세 관심을 잃고 다시 물고기에 집중하거나, 자기를 찾으러 온 부모를 따라갔지만, 라티아나는 여전히 아이의 손동작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러나 라티아나는 집중한 반면, 이번엔 아이가 집중력을 잃어버리고 부모로 보이는 어른들에게로 뛰어갔다.
아이가 뛰어가는 걸 돌아본 그가 아이가 했던 손동작들을 천천히 따라해보았다.
“수화 배우고 싶어요? 근데, 수화는 말 못하는 사람들만 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몰라요.”
인아가 그를 보며 말하자 라티아나가 아이를 향해 고개짓을 했다. 아이는 어떻게 아냐는 뜻이었다.
“저 아이는 재롱잔치에서 배웠다잖아. 그렇게 신경쓰고 배우지 않는 이상은 대부분 모른다니까.”
라티아나의 얼굴에 살짝 실망의 빛이 떴지만 이내 그는 다시 물고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그만 구경하고 가요. 생선 상하겠어요.”
그러자 그가 그녀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죽은 물고기 이제 지겨워. 이거 먹고 싶어.>
인아의 얼굴이 경악의 빛을 띠었다. 그의 손가락이 어항 속의 황금 물고기를 향해 있었던 것이다.
어항 속 물고기가 먹고 싶다니. 집이 부자니 수족관에서 우럭, 광어 같은 걸 길러서 직접 회를 떠서 먹나보다 생각하며 인아가 작게 말했다.
“이건 그냥 관상용이예요. 못 먹어요.”
그러자 그가 고집스럽게 대답했다.
<먹을 수 있어.>
“못 먹어요. 회 먹고 싶어요? 그럼 나중에…… 음…… 과외비 받으면 한 번 사줄게요.”
인아는 저렴한 횟집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왜 이 남자를 위해 이런 것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라티나 씨 데리러 온다는 사람은 대체 언제 와요? 오긴 와요?”
<어.>
라티아나가 쪼그리고 있던 다리를 펴다가 다시 주저 앉았다. 인아가 깜짝 놀라 그를 붙들었다.
“괜찮아요?”
<다리가 이상해.>
그가 놀란 눈으로 자기 다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픈 것 같진 않은데 몹시 놀란 표정이라 인아가 얼른 물었다.
“어떻게요?”
<찡찡해.>
“찡찡? 아, 저리다고요? 당연하죠. 그렇게 오래 쪼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내가 주물러 줄게요.”
인아가 바닥에 앉은 라티아나의 다리를 길게 뻗게 한 뒤 꾹꾹 주물러주었다. 젊은 부부가 그런 그들을 힐끔 보다가 강아지 사료를 골라 들고 사라졌다.
자기 다리를 꾹꾹 누르는 인아를 물끄러미 보던 라티아나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정수리를 살며시 눌렀다. 인아가 왜 그러나 해서 그를 바라보자 그의 회색 눈동자가 가지런해졌다.
<착하다.>
“응?”
아이에게나 할법한 칭찬을 날리는 그를 인아가 말간 눈으로 마주보았다.
장바구니를 하나씩 나눠들고 집앞으로 걸어오던 중, 인아는 아파트 앞에 세워져 있는 은색 세단을 보고 ‘오오’하는 감탄사를 뱉어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 외제차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안에서 갑자기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금발머리의 남자가 내렸다.
인아가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빤히 보는데, 갑자기 그가 그녀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지금 자기에게 인사를 한 게 맞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는데, 갑자기 라티아나가 그의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왜 이렇게 늦었어?>
그가 입을 열자 차에서 내린 남자가 가볍게 웃어보이며 영어로 말했다.
[여기선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목으로 소리를 내셔야 해요.]
<어떻게 하는지 몰라.>
[연습하시면 됩니다.]
인아가 눈을 크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래저래 놀라운 모습이었다. 라티아나가 저렇게 부자로 보이는 사람과 말하는 것도 놀랍고, 그의 영어를 알아듣는 것도 놀라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건 그가 라티아나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거였다.
같은 나라 사람인가? 아니 같은 나라라고 하기에는 둘의 언어가 달랐다. 저 사람은 라티아나의 목소리를 들어도 머리가 안 아파?
라티아나가 누가 찾아올 거라고 했을 때 그의 말을 무시했는데, 정말 아는 사람이 찾아올 줄이야.
[이분이 통역사입니까?]
통역사라는 단어를 알아들은 인아가 그를 빤히 보았다. 그러자 라티아나가 갑자기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여유있게 말했다.
<어.>
[잘 만나셨군요. 한국에도 통역사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여기까지 떠내려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태풍을 만났어.>
[옥토퍼는 태풍을 만나서 아직도 실종 상태랍니다.]
<못 찾았어?>
[아직 못 찾았습니다. 인간들이 하도 자연에 해를 많이 끼쳐서 예상치 못한 태풍이 많이 일어납니다.]
남자가 말을 하면서 인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인아는 휴먼 이야기를 하면서 왜 자기를 바라보나 해 그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지들은 휴먼이 아니라는 거야, 뭐야.
이제 라티아나가 자기집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인아는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선글라스 남자가 라티아나를 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가시지요.]
라티아나가 인아를 돌아보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말없이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을 선글라스 남자가 조용히 기다렸다.
한참을 인아를 바라보던 라티아나가 갑자기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더니 세단으로 다가갔다.
응? 이대로 간다고?
인아의 눈이 커졌다. 그가 집에 돌아가기를 바랬지만, 이렇게 갑자기는 아니었다.
“잠깐만요!”
인아가 갑자기 라티아나의 팔을 덥석 잡았다. 라티아나가 돌아보자 인아가 버벅거리며 말했다.
“저, 저기…… 옷 벗어놓고 가야죠. 그거 우리 오빠 옷인데. 시, 신발도……”
그러자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갑자기 안주머니에서 얇은 봉투를 꺼내서 그녀에게 건넸다.
[이거 받으시지요.]
얼떨결에 봉투를 받은 인아가 둥그레진 눈으로 그와 라티아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선글라스 남자가 불쑥 그녀 앞에 서더니 선글라스를 벗었다.
진한 파란색 눈이었다. 곧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인아가 깜짝 놀라 상체를 뒤로 물리는데, 그가 단단한 팔로 그녀의 목을 붙들었다.
“뭐, 뭐하는 거야!”
인아가 소리치자마자 라티아나가 그의 어깨를 덥석 잡아 옆으로 밀치더니 비틀거리는 인아를 긴 팔로 감쌌다.
도대체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싶어 정신을 못 차리는 인아의 얼굴로 이번엔 라티아나의 얼굴이 바싹 다가왔다.
선글라스 남자는 밀쳤지만, 라티아나의 품에서는 그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잠시 인아를 안고 시선을 맞추던 그의 회색 눈동자가 이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라티아나의 입술이 인아의 입술에 진하게 맞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