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습작 (23)
안녕하세요, 강형민입니다.
23화. 인터넷으로 알아본 생선집은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한결 허름해 보였다. 평소 같았으면 사진에 속았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이런 허름한 집이 맛집이 많으니 일단 먹어보자 식으로 생각했을 테지만, 오늘 주인아는 식당이 허름한 게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식당 못지않게 자기 옷차림도 허름하기 짝이 없었으니. 라티아나가 입으라고 준 트레이닝 복은 예전처럼 친구 옷이 아니라, 정말 자기 옷인지 팔다리가 장난 아니게 길었다. 몇 번을 걷어 입은 통에 마치 주먹왕 왈프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종아리와 팔이 두툼해져 누가 봐도 우스운 꼴이었으나, 이 눈치 없는 남자는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생선집에 가자고 졸라댔다. 인아는 먼저 사겠다고 하고선 옷차림이 이러니 못 가겠다고 하기도 그래서 그나마 이목을 덜 끌기 위..
22화. 라티아나와 있으면 서대현의 생각이 1도 안 난다고 생각했는데, 도서관 입구에서 서대현과 딱 마주쳤다. “주인아!” 그는 늘 그녀를 오랜만에 보는 것처럼 큰 소리로 이름을 불러댔다. 당장 몸을 돌려 나가고 싶은걸, 지금 그러면 너무 대놓고 피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인아는 붙박이처럼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공부하러 온 거야? 수업은?” “오늘은 오전 수업만 있어요.” “남친이 맨날 전공 강의실 앞에 기다리고 서 있다며?” 대현이 짖궂게 웃으며 말하자, 인아가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 남친 아니거든요?” 인아의 말에 그가 의외라는 듯 두 손을 허리춤에 올리며 상체를 꼿꼿하게 세웠다. “남친도 아닌데, 그렇게 매일 와?” “그냥 뭐, 밥 먹으러?” “헐. 그럼, ..
21화. 이제 주인아의 과 동기들은 물론이요, 교수들까지 모두 라티아나를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외모도 이국적이라 눈에 띠는데, 인아의 전공 강의실 앞에 항상 그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교수는 그에게 대놓고 ‘자네는 수업이 없나’라고 묻기도 했다. 그러면 이 해맑은 젊은이는 당당하게 ‘주인아와 밥 먹으러 왔습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효진은 인아를 보며 늦바람이 무섭다고 남친이랑 하루도 밥을 안 먹으면 입안에 뭐가 나냐고 빈정거렸다. 주인아가 아무리 남친이 아니라고 해도 공공연한 라티아나의 행보에 그녀도 점점 해명하기를 포기했다. "어디 아파요?" 인아가 어딘가 우울해 보이는 해끄므레한 남자를 보며 물었다. "아니? 왜?" 그가 포크를 입에 문 채로 그녀를 빤히 보았다. 젓가락질을 못 하니 당연하..
20화. 라티아나는 벽 하나를 꽉 채우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수족관에 손을 넣고 서서, 물고기들을 이리 몰고 저리 몰고 있었다. [먹을 거 가지고 장난치시는 거 아닙니다.] 푸른 눈에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애니말라가 해초 말린 간식을 쟁반에 담아오며 말했다. 그가 원래 목소리를 내자 애니말라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인간 말로 하십시오. 괜히 민원 들어옵니다.] [여기 방음 잘 된다며?] 라티아나가 짜증을 내며 하는 말에 애니말라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라티아나님 소리는 워낙 멀리까지도 전해지니.] [쳇.] [왜 계속 기분이 안 좋으십니까? 요즘 공부도, 일도 안 하시고 연애만 하시면서.] 그러자 그가 발끈하며 외쳤다. [나 지금 육지인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거야. 몰라..
19화. 오전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 밖으로 나온 인아는 저도 모르게 복도를 둘러보는 자기를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지금 누굴 찾고 있는 거야. “주인아!” 친구들과 한참 수다를 떨던 효진이 잽싸게 밖으로 나와 인아를 잡았다. “밥 같이 먹자.” “네 친구들이랑 먹어야 하지 않아?” “야, 다 같은 관데 내 친구가 네 친구지. 같이 밥 먹자고.” 인아가 뒤를 돌아보니 여자애 몇 명이 모여서 저들끼리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같은 과라고는 하나 4년 내내 그저 인사만 하던 사이다. 오는 친구 안 막고 가는 친구 안 말리는 인아는 효진이 적극적으로 다가오니 그녀와 친구가 되었던 것뿐이지, 저 친구들과도 일부러 관계성을 맺고 싶지는 않았다. 타고난 E성향인 효진은 이 사람, 저 사람과 어울리는 걸로 에너..
18화 그의 말에 잠시 넋이 나갔던 인아는 곧 냉랭하게 대꾸했다. “나, 교양 수업 바로 있어서 그만 가봐야 해요. 혼자 밥 먹든지 아니면…… 기다리든지 마음대로 해요.” 몸을 홱 돌려 계단을 내려가는 인아 뒤를 라티아나도 부지런히 따라 내려갔다. 놓치면 강의실마다 죄다 또 찾아다녀야 하는데, 그런 불편을 또 감수할 수는 없었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한 강의실에는 빈 강의실을 찾아 공부하러 들어온 학생들이 몇 있을 뿐이었다. 당연히 갈 줄 알았던 그도 느긋한 자세로 인아 옆에 앉아 있었다. 잠시 뒤, 학생들이 하나 둘 들어오고 교수가 들어오며 수업이 시작되었다. 무리 사이에서도 단연 튀는 외모의 라티아나를 다들 안 보는 척하며 힐끔힐끔 보는 게 보이는데, 그는 의외로 자기 수업도 아니면서 교수의 말에 집..
17화. 장혜림 교수는 수업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학생들이 집중을 못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조용히 하라고 하자 조용해졌다가, 나중엔 어디선가 또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창문으로 조각가가 일부러 저렇게 깎으려고 해도 못 깎겠다 싶을 정도로 선이 유려한 남자가 대놓고 강의실 안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뭐니?" "누구 찾아왔나 봐." 학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인아는 고개를 푹 파묻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커다란 회색 동공이 누구의 것인지 단번에 알아봤으니까. 장혜림은 결국 수업 분위기를 위해서는 지금 자기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들을 조용히 시킬 것이 아니라, 밖에서 있는 학생을 쫓아내야 함을 알았다. 그녀가 또각..
16. 자신의 저벅저벅 소리와 뒤에서 따라오는 저벅저벅 소리가 맞았다 어긋났다를 반복했다.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고 부지런히 지하철역을 향해 걷고 있는 인아의 뒤를 태은이 서너 발짝 떨어진 뒤에서 졸졸졸졸 따라가고 있었다. “아, 왜 따라오는데요?” 마침내 인아가 못 참고 뒤를 돌아보며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자 그가 갑자기 커다래진 눈으로 저벅저벅 다가왔다. 갑작스럽게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에 인아가 허리를 뒤로 젖히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왜, 왜요? 뭐?” “너, 조용히 해야 돼. 사람들이 쳐다 봐.” “허어……” 마치 그녀가 이상한 사람이기라도 한 양 주변 눈치를 봐 가며 말하는 그를 향해 인아가 한숨을 뱉어냈다. 외국애들은 다들 이렇게 뻔뻔한가? “왜 따라오는데요?” “너 어디 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