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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강형민입니다.

15화. 오후 5시, 마지막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인아의 전화벨이 우웅 울렸다. 과외 학생의 어머니 번호인 걸 확인하고 인아는 이보다 더 상냥할 수 없게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이제 수업 끝나서 가려고 하는데." ㅡ 선생님, 어떡하죠? 우리 예솔이가 아직 학교에서 안 왔어요. 무슨 동아리 알림제 준비를 한다나 뭐라나, 그래서 과외를 좀 늦췄으면 하는데, 선생님 시간 괜찮으신가 해서요. 이렇게 임박해서 시간을 바꾸는 경우가 왕왕 있는 탓에, 인아는 동요하지 않고 친절한 자세를 유지해다. "네. 그럼 예솔이가 언제 시간이 될까요?" ㅡ 선생님은 언제가 괜찮으실까요? 그래도 예솔이의 엄마는 매너가 좋은 편이었다. 시간을 옮길 때 과외 선생의 스케줄부터 물어봐 주니까. 어떤 학생들의 엄마는 마..

14화.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자 두통도 점점 사라졌다. 만날 때마다 남자를 주웠던 날 이야기를 하는 효진의 말에도 점점 둔감해졌다. 급기야 효진은 인아가 그를 데리고 있었던 게 거짓말이었나 의심했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인아는 완전히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제대하고 집에 있는 오빠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더 회복이 빨라진 것도 있었다. 정인은 복학하기 전에 자격증을 왕창 따놓겠다며 학원을 등록했다. 남자들은 군대 갔다오면 변한다더니 주정인도 그런 듯했다. 군대 가기 전엔 그저 한량이더니. 새학기가 시작되며 인아는 좀더 바빠졌다. 학점을 꽉꽉 채워 수강신청을 한 데다가 이제 본격적인 취업준비 모드로 들어갔기 때문에. 자소서 준비와 영어 면접 스터디를 준비하며 하루를 25시간처럼 사는 그녀에게 효정을..

13화 "어으, 머리야……" 인아는 머리를 감싸 쥐고는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잠시 어젯밤에 술을 마셨나 생각해 보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두통은 술마신 다음 날 느껴지는 숙취와 비슷했기 때문에. 잠시 멍하니 있던 그녀가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술을 마신 건 고사하고 전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나질 않았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오자,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장바구니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스며 나오는 비린내. 인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장본 걸 하나하나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 고등어, 삼치, 굴비, 임연수 등 생선 코너를 턴 것처럼 생선만 한가득이었다. 자기가 본 장이 맞나 해서 얼른 바닥에 떨어진 영수증을 들여다보았다. 어제 날짜가 찍혀 있고 동네 마트 이름도 떡하..

12화. 밖에 나와서도 곧잘 걷던 라티아나는 마트 안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걸음을 뚝 멈추었다. 토요일 마트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그러나 이런 마트에 익숙한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를 왜 그러나 해서 올려다보았다. "왜요?" 그가 입을 열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귀를 막았다. "어우, 이 소리 뭐야?" "화재 경보 아냐?" "건물에 문제 있는 거 아냐?" 그저 한 마디를 떼었을 뿐인데, 난리가 났다. 인아는 얼른 그를 데리고 스낵 코너 쪽으로 자리를 피했다. 코 아래까지 내려와 있는 마스크를 얼른 코 위까지 씌우고 후드도 더 깊숙히 씌워주자, 라티아나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안 돼요, 안 돼. 사람들이 본단 말예요." 그러나 아무리 후드를 쓰고 마스크를 써도 후드 사이로 삐져나온 ..

11화.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 때문에 눈을 뜬 인아는 문득 덮고 있는 이불에서 나는 비린내 때문에 코를 잡았다. 삼시 세 끼 생선만 먹으려 드는 남자 때문에 집안 전체에 비린내가 배었다. 우주 최강 깔끔쟁이 오빠가 휴가 나오기 전에 이 비린내를 없애야 할 텐데. 그나저나 저 인간을 데려온다는 사람은 왜 안 오는 건가. 처음엔 그들이 와서 증거를 인멸한답시고 자기를 죽이면 어떡하나 고민이었는데, 비린내에 질식될 것 같은 날들이 계속되다보니 이젠 증거를 인멸하든 말든 빨리 와서 저 남자를 치워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효진의 말을 들어보니 라티아나의 말이 이젠 그닥 신빙성 있게 느껴지지도 않고. 누구든 데리러 오기만 하면 땡큐였다.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려는데 또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10화. "그래서 지금 그 사람 혼자 집에 있어? 야, 너는 낯선 사람이 그렇게 집에 혼자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니? 뭐 훔쳐서 도망가면 어쩌려고." 학교 식당에서 만난 효진이 흥분해서 말하자, 인아가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차라리 도망갔으면 좋겠다." "응?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인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가 외국 조직의 보스 아들인 거 같다느니, 누군가가 찾으러 온다고 했다는니 설명을 늘어놓았다. 친구의 설명을 듣고 있던 효진은 처음엔 놀란 반응이었다가, 곧 무시하는 투로 말했다. "야, 그거 다 그 사람이 한 이야기 아냐?" "어? 그렇지." "야, 외국 조직 보스의 아들이고, 부자고, 누군가가 찾으러 올 정도로 유명한 사람인데, 샌드위치 비닐도 못 까고, 화장실 사용법도 알려줘야 하고, 수도에서..

9화. 다음날, 잠을 못 자 퉁퉁 부은 눈을 비비며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는 인아를 경비원이 불렀다. "저기, 503호시죠?" "네? 아, 네." 인아가 고개를 꾸벅하며 대답하자 경비원이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뭐 밤새도록 뭐 기계같은 거 틀어놨어요?" "기계요? 무슨……" "아니, 어젯밤에 계속 민원이 들어와서. 계속 삐이이이이 이런 소리가 난다고. 근데, 이게 계속 들리는 게 아니라 들렸다 안 들렸다 한다고. 텔레비젼 소리는 아닌 것 같다고 하던데…… 라디오 틀어놨어요?" "아, 아니오……" 대답하면서도 대충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병원에서도 봤던 반응이었다. "나중엔 화장실에서도 들린다고 하더라구요. 화장실에서 들리면 기계도 아닐 텐데…… 어디 전기가 잘못됐나……" 경비원은 인아..

8화. 세면대에도 물이 가득 차다 못해 넘칠듯 찰랑거리고 욕조도 물이 반 이상 찼다. 그런데도 수도꼭지에서는 여전히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화장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그걸 뚫어지게 보고 있는 새하얀 남자. 그의 눈은 생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눈동자 색이 병원에서 봤을 때보다 진해져 있었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인아가 부지런히 수도꼭지를 잠그며 그를 향해 외쳤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수돗물은 다 틀어놓고!" 그가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고 물었다. "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수도를 안 써? 아니면 수도꼭지가 이렇게 안 생겼나? 이탈리아에 가본 적 없는 인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긴, 이탈리아는 커녕 가까운 일본도 못 가봤다. 라티아나가 허리를 잔뜩 수그린 채 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