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강형민입니다.
8화 본문
8화.
세면대에도 물이 가득 차다 못해 넘칠듯 찰랑거리고 욕조도 물이 반 이상 찼다. 그런데도 수도꼭지에서는 여전히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화장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그걸 뚫어지게 보고 있는 새하얀 남자.
그의 눈은 생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눈동자 색이 병원에서 봤을 때보다 진해져 있었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인아가 부지런히 수도꼭지를 잠그며 그를 향해 외쳤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수돗물은 다 틀어놓고!"
<정말 신기해. 이 좁은 데서 어떻게 이렇게 물이 계속 나와?>
그가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고 물었다.
"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수도를 안 써? 아니면 수도꼭지가 이렇게 안 생겼나?
이탈리아에 가본 적 없는 인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긴, 이탈리아는 커녕 가까운 일본도 못 가봤다.
라티아나가 허리를 잔뜩 수그린 채 욕조에 담긴 물을 할짝이더니 다시 소리쳤다.
<물 맛이 되게 밍밍하다. 밍밍하다는 말을 듣기는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영양분은 하나도 안 들어 있겠네? 물고기 똥은 다 걸러내는 거야? 왜?>
수돗물을 보며 물고기 똥 운운하는 남자를 보며 인아는 막연히 그의 집에 거대 수족관이 있나 생각했다.
"물 나오는 게 신기해도 이렇게 틀어놓고 있지 마요. 수도 요금 많이 나와."
<수도 요금?>
"네. 이거 다 돈내고 쓰는 거란 말이예요."
<물을 쓰는 데 돈을 낸다고? 물 주인이 누군데?>
본질적인 질문에 인아의 고개가 갸웃했다. 그러게. 물 주인이 누굴까. 그러나 이내 이성을 찾고 그에게 물었다.
"이탈리아는 수도 요금 안 내요?"
<이탈리아는 모르겠고 우리는 그런 거 없어.>
거대 조직은 수도 요금 따위는 내지 않는 듯했다. 영화 대부를 다시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인아는 라티아나를 억지로 일으켰다.
주차장에서보다 한결 잘 걷는 걸 보며 그녀는 무심코 그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어?"
<왜?>
"발가락이……"
죄다 붙어 있던 발가락이 다 떨어져 있었다. 발가락 다섯 개. 발톱은 없지만, 발가락은 틀림없는 다섯 개였다.
"발가락이 다 떨어졌잖아요! 병원에서는 다 붙어 있었는데?"
<원래 천천히 떨어져. 왜 걷기가 좀 편해졌나 했더니, 발가락이 생겨서 그런 거였구나. 신기하네.>
"무슨 말이야. 발가락이 막 붙었다 떨어졌다 해요?"
<어.>
"으응? 체질인……가?"
말하면서도 이상했다. 그런 체질이 있을 리가 있나. 그러고 보면 그와의 대화내용이 다 좀 이상하긴 했다.
애초부터 다들 그의 목소리에 귀를 막는데, 그녀의 귀에만 제대로 들리는 것도.
그러나 이걸 그에게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구체적으로 무엇을 불어봐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그녀는 입만 벙긋댈 뿐이었다.
몸은 피곤한데 잠은 오질 않았다. 건너방에 있는 외간 남자도 신경쓰이고.
자기 물건 만지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 오빠 방에 저 남자를 넣어놨으니, 나중에 수습할 일이 걱정되었지만 군대가 어떤 곳인가. 한 번 들어가면 자유롭게 나올 수 없는 곳이 아닌가.
오빠가 휴가나올 때쯤엔 저 남자는 고향으로 돌아가 있을 것이다. 인아는 그 사복 경찰에게 라티아나의 이름과 그가 이탈리아 근처에 사는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이젠 대한민국 경찰의 몫이다. 그녀는 대한민국 경찰의 정보력을 믿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찰방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잠시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인아는 다시 들려오는 찰방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남자가 아까도 수돗물을 가지고 놀더니 또 화장실에서 놀고 있나 싶었다.
방문을 열고 성큼성큼 화장실로 간 그녀는 문을 똑똑 노크하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라티나 씨! 또 화장실에 있어요? 지금 한밤중이예요!"
<난 여기서 잘거야.>
"에에?"
너무 어이가 없어 인아가 화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뜻밖에 라티아나는 물이 가득 담긴 욕조 안에 들어가 있었다. 온통 살색인 물을 본 인아가 기겁을 하며 몸을 홱 돌렸다.
"한밤중에 왜 벌거벗고 욕조 안에 들어가 있는데요?"
온통 시뻘게진 인아와는 달리 그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소금 없어?>
"소, 소금은 왜요?"
<몸이 가라앉아 있으니까 잠을 못 자겠어.>
그녀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를 힐끔 돌아보았다가 얼른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바다처럼 소금물 만들어서 몸을 띄우겠다고? 그게 말이 돼요? 그게 소금이 얼마나 많이 필요할 텐데."
<소금 없어?>
"당연히 그 정도는 없죠!"
<너네 집 가난하구나?>
"헐!"
인아가 못참고 몸을 다시 홱 돌렸다. 그러다가 얼른 그의 몸이 안 보이는 곳까지 물러서며 말했다.
"라티나 씨. 대체 어떤 환경에서 살았는지 모르겠는데, 나 이래뵈도 중산층이거든요? 물론 새엄마가 준 집이긴 하지만, 어쨌든 서울 시내에 이런 아파트 갖고 있는 사람이 흔한 줄 알아요?"
<라티아나. 라티아나라고. 왜 자꾸 라티나라고 불러?>
"이름이 너무 길어서 외우기 힘들다고요!"
<집도 가난하고, 머리도 나쁘고. 내 말 알아듣는 것 말고는 유익이 없는 여자군, 주인아는.>
인아의 입이 떡 벌어졌다. 뻔뻔함이 도를 지나쳐 이젠 인신공격까지 하는 그를 보며 인아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생각 같아서는 머리라도 한 대 쥐어박고 싶은데, 가까이 가면 다 보이는 통에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다.
"하여튼 나와요. 감기 걸려."
<안 걸려. 내가 살던 데가 얼마나 추운데.>
응? 춥다고? 이탈리아, 멕시코 이런 데는 더운 나라 아닌가? 이럴 줄 알았으면 지리공부를 좀 할 걸 하고 뒤늦게 후회가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나저나 이 남자는 부끄러움이 없는 건가, 홀딱 벗고 있으면서 여자가 옆에 있으면 움츠러들만도 한데, 그는 전혀 그런 게 없었다. 오히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으니.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발이 안 떨어져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라티아나가 무구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들어오고 싶어?>
"네, 네?"
인아의 얼굴이 목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라티아나가 진지하게 말했다.
<참아. 너 들어오면 너무 좁아서 안 돼..>
"이…… 이…… 이봐요!"
알고보니 이 남자는 그저 모자라는 정도가 아니라 변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