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강형민입니다.
9화 본문
9화.
다음날, 잠을 못 자 퉁퉁 부은 눈을 비비며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는 인아를 경비원이 불렀다.
"저기, 503호시죠?"
"네? 아, 네."
인아가 고개를 꾸벅하며 대답하자 경비원이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뭐 밤새도록 뭐 기계같은 거 틀어놨어요?"
"기계요? 무슨……"
"아니, 어젯밤에 계속 민원이 들어와서. 계속 삐이이이이 이런 소리가 난다고. 근데, 이게 계속 들리는 게 아니라 들렸다 안 들렸다 한다고. 텔레비젼 소리는 아닌 것 같다고 하던데…… 라디오 틀어놨어요?"
"아, 아니오……"
대답하면서도 대충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병원에서도 봤던 반응이었다.
"나중엔 화장실에서도 들린다고 하더라구요. 화장실에서 들리면 기계도 아닐 텐데…… 어디 전기가 잘못됐나……"
경비원은 인아에게 물어보기는 하면서도 자기가 듣기에도 말이 안 된다 생각했는지 주차장 쪽으로 무심히 걸어갔다.
그녀는 부지런히 쓰레기를 버리고 달음질쳐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거실에는 라티아나가 가운만 입은 채로 소파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엎드려 있으니 다행이지, 똑바로 누우면 헐벗은 모습일 게 분명해 인아는 부지런히 이불을 가져다가 그를 덮어주고는 옆에 쪼그리고 앉아 그를 흔들었다.
"라티나 씨, 라티나 씨."
그의 입에서 새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그녀가 잠시 그를 내려다보았다. 말이 아니라 그런가 이번엔 사람 말로 들리지 않는 게 신기했다.
다른 사람들은 계속 이렇게 들리는 건가?
"라티나 씨. 일어나 봐요."
다시 삐이이 거리는 새소리가 새어 나오자 인아가 얼른 그의 입을 막았다. 숨이 막혔는지 라티아나가 눈을 번쩍 떴다.
그가 커다란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자 인아가 손을 떼고 말했다.
"라티나 씨. 앞으로 작게 말해요."
<응?>
"작게 말하라고. 아주 작게."
<왜?>
"당신 목소리가 주변에 다 들리나 봐요. 어제 민원 장난 아니게 들어왔대."
<......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몰라.>
"그냥, 지금처럼 말하는데, 소리만 작게 내보라고요."
인아가 속삭이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지금 나처럼. 요정도로."
<이렇게?>
좀전보다는 훨씬 줄어든 소리긴 했다. 어째 목소리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 목소리는 확실히 아니고, 그렇다고 여자 목소리도 아니고. 미소년 목소리 정도 되겠다 싶었지만 이도 확실치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기계음 같다느니, 머리나 귀가 아프다느니 하는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는 왜 미소년 목소리로 들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좋아요. 앞으로 그렇게 말해요. 아주 아주 작게."
<어.>
어쩐 일인지 그가 착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잠이 덜 깨 그런가보다 생각하면서도 인아는 그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아침이라 그런가, 분위기가 몽글몽글한 것이 그저 따뜻해 생긋 웃는데, 라티아나가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헛!"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가 얼른 그의 정수리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큼흠. 미안해요. 뭐 먹을래요? 나는 오늘 학교 가야 돼서 라티아나 씨 혼자 있어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더 해 봐.>
그가 작게 속삭이자 인아가 잘 안들려 다시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네? 뭐라고요?"
<더 해보라고.>
"뭘요?"
<이거.>
그가 갑자기 이불밑으로 손을 쑥 빼더니,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놨다.
<해.>
인아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으나, 라티아나는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손을 떼고 눈을 감았다.
황당해하면서도 그녀가 그의 머리를 아까처럼 쓰다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고로롱 소리를 내며 다시 잠이 들었다.
애기…… 변탠가……?
더이상 수업을 빠지는 건 말도 안 되고 이 애기같은 남자를 혼자 놔두는 것도 말이 안 됐다.
그는 뜻밖에 영어를 알았다. 물론 아주 잘 아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달력에 영어로 써 있는 FRIDAY를 읽는 것이다.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문자를 보내요."
인아가 컴퓨터에 까똑을 열어주고는 자판을 보여주며 말했다.
"봐봐요. 이거 이렇게 누르면 글자 나오죠. 그걸로 말하면 돼요. 전화가 제일 좋긴 한데, 휴대폰 밖에 없어서 천상 문자로 해야 돼요. 그리고 이거 누르면……"
그녀가 엔플릭스를 클릭하자 다양한 영화 화면이 둥 떴다.
"이거 다 영화예요. 보고 싶은 거 눌러서 봐요. 그리고 밥은……"
<물고기.>
라티아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물고기는 없어요. 내가 이따가 김밥 배달시켜줄 테니까 벨 소리 들리면 30초 있다가 나가요. 그럼 집 앞에 김밥 있을 거예요."
<김밥?>
"네. 각종 야채와 고기가 들어있어서 영양가 있는 한국 전통 음식이예요."
전통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너에게 좋은 것을 먹이고 있다는 걸 어필하기 위해서 그녀가 굳이 설명을 덧붙였다.
"혼자 있을 수 있겠어요?"
<어.>
"누가 벨 눌러도 문 열어주지 말고."
<김밥은?>
"아, 그건 저기 월패드로 보고 누가 뭐 놔두고 가는 것 같으면 그 사람 간 다음에 열어요. 오케이?"
<어. 후우……>
갑자기 그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왜요?"
<답답해.>
"계속 작게 말해야 돼서 힘들어요?"
<그것보다…… 아니야.>
"어디 아픈 건 아니죠?"
<아냐.>
"경찰이 가족 열심히 찾고 있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봐요. 곧 집에 갈 수 있어."
솔직히 너가 빨리 갔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가 온지 이제 겨우 이틀인데 2년은 지난 것 같은 피로감이 느껴졌다.
<데리러 올거야.>
라티아나가 자판을 검지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면서 말하자, 인아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누가요?"
<시종이.>
"누구요?"
<시종.>
"시종? 하인 뭐 이런 거요?"
<정확히 말하면 관리자지. 내가 어디로 흘러왔는지 몰라서 지금 못 찾고 있는 거 같은데, 곧 찾아올 거야.>
"관리자가 가족 말하는 거 맞아요?"
<가족? 우린 그런 거 없어.>
조직은 가족이 없나 보았다. 하긴 영화에서 보면 그들은 다 서로를 패밀리라고 부르는 것 같긴 했다. 어쨌든 누군가가 데리러 온다니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럼 경찰한테도 말해야 하는 건가? 아니 잠깐. 조직 같은 데서 데리러 오는 거면 나도 위험해지는 거 아냐? 증인 죽여서 증거 인멸하고 뭐, 그런 거 아니겠지?
갑자기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라티나 씨."
<라티아나.>
"라티아나 씨. 내가 당신 도와준 거 알죠? 나는 당신이 누구라고 그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 없어요. 솔직히 당신이 누군지도 잘 모르고."
라티아나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러니까 날 죽여서 증거를 인멸하려고 한다거나 그럴 생각이면 포기해요. 나 없어지면 당장 경찰들이 찾을 거예요. 당신은 당연히 용의선상에 오를 거고. 우리 나라 경찰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죠? 과학기술로 공소시효 끝난 사건 범인도 죄다 찾는다고요"
<뭐라는 거야.>
그가 중얼거리며 다시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빨리 가족을 찾기를 바랬는데, 그를 아는 누군가가 찾아온다고 하니, 생각이 많어지는 그녀였다.
뭔가 단서를 마련해 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없어져도 금방 찾을 수 있게끔. 시신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