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강형민입니다.
11화 본문
11화.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 때문에 눈을 뜬 인아는 문득 덮고 있는 이불에서 나는 비린내 때문에 코를 잡았다.
삼시 세 끼 생선만 먹으려 드는 남자 때문에 집안 전체에 비린내가 배었다. 우주 최강 깔끔쟁이 오빠가 휴가 나오기 전에 이 비린내를 없애야 할 텐데.
그나저나 저 인간을 데려온다는 사람은 왜 안 오는 건가. 처음엔 그들이 와서 증거를 인멸한답시고 자기를 죽이면 어떡하나 고민이었는데, 비린내에 질식될 것 같은 날들이 계속되다보니 이젠 증거를 인멸하든 말든 빨리 와서 저 남자를 치워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효진의 말을 들어보니 라티아나의 말이 이젠 그닥 신빙성 있게 느껴지지도 않고. 누구든 데리러 오기만 하면 땡큐였다.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려는데 또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이번 달 수도요금 어쩔거야……"
인아가 창틀에 팔꿈치를 괴고 머리를 감싼 채 한숨을 쉬었다. 저남자의 집에는 엄청 큰 수영장이 있을 게 분명해다. 안 그러면 저렇게 욕조 안에 들어가 있는 걸 좋아할 수가 없다.
인아는 거실로 나가 화장실 앞에 팔짱을 껴고 섰다.
"라티나 씨. 또 물놀이 해요?"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작게 말하라고 하도 푸시를 했더니, 이제 그는 쓸데없는 대답은 아예 하지 않았다.
"그만 나와요. 나도 화장실 써야 돼."
한동안 조용하다가 다시 첨벙 소리가 들리더니 화장실 문이 열리고 키가 큰 남자가 가운 차림으로 나왔다.
머리는 염색을 했던 건지 순백이던 게 많이 노리끼리 해졌다. 얼굴도 이제는 핏기가 좀 돈다.
"물 또 새로 받았어요? 쓰던 물 쓰라니까."
<여긴 순환이 안 되잖아. 더러워.>
작은 소리로 심플하게 대답한 그가 저벅저벅 걸어 소파에 가서 털썩 주저 앉았다. 이제는 걷기도 잘 걸었다. 병원에서 한 행동이 완전히 쇼였던 것처럼.
그가 회복되면 회복될수록 인아는 그가 사기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자기는 그런 사기꾼에게 홀라당 넘어간 반푼이고.
혹시 병원 직원들도, 경찰들도 다 한패가 아닐까. 그 사람들이 정말 경찰인지, 병원 직원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음모론까지 생각하며 넋을 놓고 그를 쳐다보자, 라티아나가 그런 그녀를 마주 보며 말했다.
<왜?>
"아니, 그냥…… 데리러 온다던 사람은 언제 와요?"
<나도 궁금해.>
"안 오는 건 아니죠?"
<그럼 걔네들, 아버지한테 죽어.>
"으응?"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그를 보며 인아는 그 말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또 넋을 놓고 있는 인아에게 라티아나가 어서 화장실 쓰라는 듯 손짓을 하더니,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바람에 가운이 벌어지며 새하얀 다리가 드러났다. 너무 위쪽까지.
"가운 좀 제대로 여며요. 다 보여."
인아가 벌게진 얼굴을 돌리며 툭 던지자 라티아나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다 봤잖아.>
화장실에 들어가려던 인아가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내, 내가요? 내가 언제?"
<그때 욕조에 있을 때.>
“무, 무슨…… 볼 뻔했지만, 안 봤거든요?”
<봐도 뭐, 상관은 없어. 너네들은 옷을 입고 다니니까 벗고 있는 게 어색할 수 있는데, 우리는 안 그렇거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럼 다들 벗고 있다고? 세상에 어느 나라가? 요즘은 아프리카 원주민들도 다들 옷은 입고 살던데.
효진의 말대로 그의 말은 신빙성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인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따가 경찰한테나 다시 전화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이것저것 요구사항이 많은 라티아나와 종일 같이 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 집앞 어린이집이 그렇게 버글버글대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엄마도 좀 쉬어야 할 것 아닌가.
그와 좀 떨어져 있을 겸 물고기 사오겠다는 핑계로 집을 나서는 인아를 라티아나가 부지런히 쫓아나왔다.
“왜요?”
인아가 신발을 꺾어신은 채 그를 보자 라티아나가 설레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같이 나가.>
“응? 어딜 나가요?”
<밖에. 이 안에만 있었더니 너무 답답해.>
“잘 걷는 건 알아요. 그래도 밖에 나가기엔……”
그의 외모가 너무 이국적이었다. 틀림없이 시선을 끌 텐데. 무엇보다 집안에서도 이상한 말과 행동을 반복하는데 밖에서도 그러면 정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나가면 말 안 할게.>
“...... 그래도 말이 나오지, 안 나오겠어요? 사람들 다 귀 부여잡고 그러면 어떡하려고요? 다들 이상하게 볼 텐데.”
<...... 나가지 마?>
“아니, 내 말은……”
갑자기 풀죽은 강아지 같아진 그를 보며 인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하긴, 강아지도 의무적으로 하루 한 번 이상은 산책을 시켜줘야 한다던데, 사람이 어떻게 계속 집에만 있나 싶기도 했다.
“그래요. 그럼 신발 신……”
그러고보니 그는 신발이 없었다. 해변에서 발견되었을 때는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았고 인아의 집까지는 병원 슬리퍼를 신고 왔다.
그녀는 신발장에서 오빠의 운동화를 꺼냈다. 자기 운동화 남이 신은 거 알면 죽이려 들텐데.
죽이려 들기 전에 제발 그가 살던 곳으로 돌아갔으면 하고 바라면서 그녀는 라티아나 앞에 운동화를 놔주었다.
“조금 클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맨발로 나갈 수는 없으니까 이거 신어요.”
라티아나는 신기한 표정으로 그녀가 내놓은 운동화에 발을 끼었다. 인아의 예상대로 신발이 커서 그의 발이 약간 덜거덕거리는 것 같았지만, 라티아나는 운동화가 꽤 마음에 드는 듯했다.
신발장에 붙은 거울을 보며 몇 번이나 발을 움직여보는 그를 보며 인아는 또한번 귀엽다 생각했다.
그나저나 나이는 몇 인지. 어리면 정말 귀여운 거고, 많으면 나잇값을 못하는 건데. 그의 얼굴만 봐서는 당최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몇 살이예요?”
생각만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질문이 나갔다. 그러자 거울로 계속 운동화를 살피던 그가 그녀를 유심히 보았다.
왜 그러나 하고 마주보는 그녀를 향해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에 인아는 갑자기 심장이 두근했다. 저렇게 웃을 줄도 알아?
<너보다 많아.>
잠시 설렜던 마음을 애써 다스리며 인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보통 상대방보다 어린애들이 그러지 않나?.”
<진짜야.>
그러나 인아는 대답하지 않고 오빠 방으로 들어가 패딩 점퍼를 가지고 나와 그에게 내밀었다.
“밖에 추우니까 이거 입어야 돼요.”
<고마워.>
역시나 처음 들어보는 인사였다. 그동안 그렇게 잘해줬어도 그는 늘 당연한 듯 받았었다. 이 남자가 오늘따라 왜 이러나 하며 인아는 쿵쿵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현관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