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강형민입니다.
12화 본문
12화.
밖에 나와서도 곧잘 걷던 라티아나는 마트 안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걸음을 뚝 멈추었다. 토요일 마트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그러나 이런 마트에 익숙한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를 왜 그러나 해서 올려다보았다.
"왜요?"
<인간이 너무 많……>
그가 입을 열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귀를 막았다.
"어우, 이 소리 뭐야?"
"화재 경보 아냐?"
"건물에 문제 있는 거 아냐?"
그저 한 마디를 떼었을 뿐인데, 난리가 났다. 인아는 얼른 그를 데리고 스낵 코너 쪽으로 자리를 피했다.
코 아래까지 내려와 있는 마스크를 얼른 코 위까지 씌우고 후드도 더 깊숙히 씌워주자, 라티아나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안 돼요, 안 돼. 사람들이 본단 말예요."
그러나 아무리 후드를 쓰고 마스크를 써도 후드 사이로 삐져나온 노리끼리한 머리와 큰 키, 늘씬한 몸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오히려 너무 가린 탓에 연예인인가 해서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 많은 1층을 피해 위로 올라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 앞에 선 라티아나가 발을 내딛다 말고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왜? 에스컬레이터 처음 봐요?"
인아가 그를 올려다볼 때 뒤따라 타려던 사람들이 투덜거리며 그들을 밀쳤다. 그 바람에 얼떨결에 계단 위에 올라선 라티아나가 균형을 못잡고 흔들거리다가 인아를 덥석 끌어안았다.
늘 손발이 차가워 보통 사람보다 체온이 낮은가 했는데, 후드에 패딩까지 입어 그런지 그의 품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또 무척 넓고.
서로 얼싸안고 있는 그들을 에스컬레이터에 있는 사람들이 힐끗힐끗 보고,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은 혀를 차기도 했다.
인아는 머리로는 그를 뿌리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라도 움직이는 계단 위에서 그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싶은 마음에 그를 안은 두 팔에는 힘이 들어갔다.
에스컬레이터가 2층에 도착해 가까스로 계단을 내려온 라티아나가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움직이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인아는 그를 데리고 이번엔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으로 가며 작게 물었다.
“놀랐어요? 이탈리아에도 에스컬레이터 있지 않나? 거기 선진국인데. 아니 남미니까 선진국이 아닌가?”
그녀의 말에 라티아나가 뭐라고 대꾸를 하려는듯 보이자, 그녀가 얼른 팔을 뻗어 그의 마스크를 눌렀다.
“아,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라티나 씨가 말하면 또 난리난다.”
그러자 그가 갑자기 허리를 천천히 숙이더니, 그녀의 볼에 닿을 듯 자기 볼을 갖다대며 속삭였다.
<이렇게 작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옷으로도 안 가려지는 비주얼을 가진 청년이 여자친구의 볼에 입을 맞추는 것처럼 보였을 게 분명했다.
인아는 집에서 나올 때처럼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얼른 고개를 뒤로 물렸다.
“이, 이렇게 작게 말하면 괜찮긴 하지만 너무 붙지는 말아줄래요? 누가 보면 뽀뽀하는 줄 알겠어.”
그러자 라티아나는 이번엔 그녀의 어깨를 안고 바싹 끌어당기며 여전에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 그거 잘해.>
“뭐, 뭘 잘해요?”
<뽀뽀. 해볼래?>
“으아악!”
인아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그에서 떨어졌다. 가뜩이나 이목을 끄는 커플인지라 몰래 보던 사람들이 이제는 대놓고 쳐다봤다.
“그걸 나랑 왜 해요!”
인아가 목까지 시뻘게져서 소리치자 검은색 마스크 위로 나와 있는 라티아나의 눈이 꿈벅꿈벅했다. 틀림없이 그녀가 왜 칠색팔색을 하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에 부채질을 하다가 이내 다시 그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 쪽을 향했다.
그와 쇼핑을 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탓에 그녀는 마트 건물의 옥상공원으로 향했다.
바글바글하던 마트 안과는 달리 옥상 위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부부가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들 옆에는 방금 본 건지 장바구니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우리, 여기 왜 있어?>
라티아나가 자기 옆에 앉아 있는 인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처음 그가 그럴 때는 귀도 간질간질하고 심장도 간질간질하더니, 몇 번 당해 봐서 그런지 한결 괜찮아진 인아가 조용히 대꾸했다.
“마트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여기서 쉬는 거예요.”
<물고기 산다고 하지 않았어?>
“사려고 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잖아.”
<돈이 없어?>
사람이 많아서 쇼핑을 못 하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는 자꾸 딴소리를 했다. 인아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라티나 씨 물고기 사줄 돈은 있어요.”
<조금만 기다려. 돈 많이 줄게.>
“응? 어떻게요?”
돈 얘기가 나오자 인아의 눈이 반짝 빛을 뿜었다. 낯선 눈빛에 놀란 라티아나가 슬그머니 그녀에게서 고개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관리자가 돈 가지고 올거야.>
그의 말에 인아가 다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관리자가 오긴 해요?”
<어.>
“이왕 오는 거 라티나 씨 말대로 돈이나 많이 싸들고 왔음 좋겠네요.”
<그럴 거야. 근데 쟤네는 아직 새끼 같은데 잘 뛰어다니네.>
갑자기 그가 욕을 하는 줄 알고 인아가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부모가 듣기라도 했을까 봐.
그러나 이내 그의 목소리를 들었으면 저 부모가 저렇게 가만히 있겠나 싶어 다시 조용히 말했다.
“새끼는 여기선 욕이예요. 아이들이라고 해요. 아이들.”
<아이들이나 새끼들이나……>
“하긴, 라티나 씨가 그렇게 말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긴 하지.”
<나도 한 번 해볼까?>
라티아나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뭘 해봐요?”
인아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으나, 그는 갑자기 반대쪽을 향해 저벅저벅 걷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에만 집중하던 부부가 넋 놓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다음 행동에 둘다 입이 쩍 벌어졌다.
갑자기 그가 어린아이처럼, 정확히 말하면 자기네 아이들처럼 위아래로 펄쩍펄쩍 뛰는 게 아닌가.
그러나 이내 중심을 못 잡고 그가 바닥에 나뒹굴자 부부 중 남자가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튀어나간 인아가 얼른 남자를 향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 아아, 괜찮아요, 괜찮아요. 이 사람이 몸이 좀 아파서요. 제가 할게요. 제가.”
남자가 머쓱한 얼굴로 다시 아내 곁으로 돌아가자 인아가 라티아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난처한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요? 뭐 한 거예요?"
후드가 벗겨져 드러난 그의 금발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은 흡사 텔레비젼 광고 같기도 했다.
<나도 쟤들처럼 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 비켜봐. 다시 해보게.>
그가 인아를 팔로 치우더니 다시 일어나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이제는 놀던 아이들까지 그가 뛰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들이 뛸 때는 몰랐는데, 다 큰 어른이 뛰고 있으니 요상해보였나보다.
제자리에서 폴짝거리던 그가 이내 긴 다리를 앞으로 쭉 뻗더니 이번엔 달리기 시작했다. 점점 속도가 붙고 그는 마치 100미터 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옥상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보여, 인아는 그를 말리기 위해 같이 뛰기 시작했다.
"뭐해요! 그만해요!"
갑자기 펼쳐진 나 잡아봐라를 네 식구가 벤치에 나란히 앉아 구경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과자까지 들고 앉아.
***
마트 한 구석에 마련된 반려동물 코너에는 토끼, 햄스터, 거북이, 앵무새, 심지어 도마뱀까지 다양한 반려동물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큰 물고기부터 작은 물고기들까지 다양한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다양한 크기의 어항들이 한쪽 벽을 채웠다.
그 앞에 물고기를 구경하기 위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 틈에는 커다란 덩치의 외국인도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답답하다고 벗어버린 후드 때문에 온전히 드러난 라티아나의 새하얀 피부와 백금발은 누가 봐도 한국인의 모습은 아니라 눈에 확 띠었다.
게다가 아이들처럼 무구하기 짝이 없는, 솔직히 말하면 좀 모자라 보이는 행동 덕에 더 관심이 집중되는 것도 있었다.
“우리 언제 가요?”
인아가 그의 뒤에서 한숨을 쉬며 물었으나,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금색 물고기 멋있다.”
“나는 빨간색.”
“파란색 좋아.”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종알거리는 말에 라티아나도 끼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자기가 입을 열면 무슨 사태가 벌어지는지 병원에서 내내 경험한 탓에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위기가 찾아왔다. 머리를 양쪽으로 묶은 귀여운 여자애가 그에게 말을 건 것이다.
“아저씨도 물고기 좋아해요?”
인아는 그가 무심결에 입을 열까봐 기겁해서 그를 쳐다보았지만, 라티아나는 용케 소리는 내지 않고 그렇다는 듯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자 아이들이 이상한 눈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아저씨, 말 못해요?”
인아가 대꾸하기 전에 라티아나가 다시 입을 벙긋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이번엔 안경을 쓴 똘망똘망해보이는 남자아이가 말했다.
“그럼 손으로 말할 수 있어요? 나 재롱잔치 때 수화 배워서 안다요? 이게 안녕하세요고…….”
아이가 오른손바닥으로 반대쪽 팔을 쓱 쓸더니 주먹을 꼭 쥐어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게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이가 이번엔 두 손가락을 모았다가 이내 두 손을 위아래를 엇갈려 흔들어 보였다.
라티아나는 아이의 동작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인아도 저절로 아이를 쳐다보게 되었다.
아이들은 물론이요 어른도 자기 행동을 집중해서 보고 있으니, 신이 난 아이가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수화를 알려주려는 양 정신없이 손을 움직여 보였다.
아이들은 금세 관심을 잃고 다시 물고기에 집중하거나, 자기를 찾으러 온 부모를 따라갔지만, 라티아나는 여전히 아이의 손동작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라티아나는 집중한 반면, 이번엔 아이가 집중력을 잃어버리고 부모로 보이는 어른들에게로 뛰어갔다.
아이가 뛰어가는 걸 돌아본 그가 아이가 했던 손동작들을 천천히 따라해보았다.
“수화 배우고 싶어요? 근데, 수화는 말 못하는 사람들만 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몰라요.”
인아가 그를 보며 말하자 라티아나가 아이를 향해 고개짓을 했다. 아이는 어떻게 아냐는 뜻이었다.
“저 아이는 재롱잔치에서 배웠다잖아. 그렇게 신경쓰고 배우지 않는 이상은 대부분 모른다니까.”
라티아나의 얼굴에 살짝 실망의 빛이 떴지만 이내 그는 다시 물고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그만 구경하고 가요. 생선 상하겠어요.”
그러자 그가 그녀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죽은 물고기 이제 지겨워. 이거 먹고 싶어.>
인아의 얼굴이 경악의 빛을 띠었다. 그의 손가락이 어항속의 황금 물고기를 향해 있었던 것이다.
어항 속 물고기가 먹고 싶다니. 집이 부자니 수족관에서 우럭, 광어 같은 걸 길러서 직접 회를 떠서 먹나보다 생각하며 인아가 작게 말했다.
“이건 그냥 관상용이예요. 못 먹어요.”
그러자 그가 고집스럽게 대답했다.
<먹을 수 있어.>
“못 먹어요. 회 먹고 싶어요? 그럼 나중에…… 음…… 과외비 받으면 한 번 사줄게요.”
인아는 저렴한 횟집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왜 이 남자를 위해 이런 것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라티나 씨 데리러 온다는 사람은 대체 언제 와요? 오긴 와요?”
<어.>
라티아나가 쪼그리고 있던 다리를 펴다가 다시 주저 앉았다. 인아가 깜짝 놀라 그를 붙들었다.
“괜찮아요?”
<다리가 이상해.>
그가 놀란 눈으로 자기 다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픈 것 같진 않은데 몹시 놀란 표정이라 인아가 얼른 물었다.
“어떻게요?”
<찡찡해.>
“찡찡? 아, 저리다고요? 당연하죠. 그렇게 오래 쪼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내가 주물러 줄게요.”
인아가 바닥에 앉은 라티아나의 다리를 길게 뻗게 한 뒤 꾹꾹 주물러주었다. 젊은 부부가 그런 그들을 힐끔 보다가 강아지 사료를 골라 들고 사라졌다.
자기 다리를 꾹꾹 누르는 인아를 물끄러미 보던 라티아나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정수리를 살며시 눌렀다. 인아가 왜 그러나 해서 그를 바라보자 그의 회색 눈동자가 가지런해졌다.
<착하다.>
“응?”
아이에게나 할법한 칭찬을 날리는 그를 인아가 말간 눈으로 마주보았다.